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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조 소개 

 

 

 

예천권씨는 득성(得性)초기부터 후손이 귀했는데, '사성시조(賜姓始祖)'인 '권섬(權暹)'도 '권군보(權君保)'만을 두었다. 

 

'권군보(權君保)'의 손자 '권맹손(權孟孫)'은 조선 초기 대제학, 이조판서등을 역임한 당대의 문장가로 '대동시림' 등을 남겨 가문을 빛냈고, 아우 '권유손(權幼孫)'은 두형제 두었다. 


'권유손(權幼孫)'의 둘째 '권선(權善)'이 선대에 드물게 5형제를 두었고, 이들 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나섰다. 


이 시기에 가문이 크게 번창하여 조정에서는 예천권씨 가문을 '오복문(五福門)'이라 칭하며, 모든 이들이 부러워 하였다고 한다. 특히 그 중에서도 '백미(白眉)'는 '권오복(權五福)'으로,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받아 성종17년 문과에 급제하고 사관으로 활약 하였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인하여 젊은 나이에 졸(卒) 하였다.


권세에 아부하지 않고 부귀공명에 연연하지 않은 대쪽 같은 선비의 기개는 8세손 '권문해(權文海)'에게 이어졌다. 그는 일찍이 퇴계 이황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영남학파의 주류로 예천권씨의 명성을 일으켰다. 명종 7년 문과에 급제한 그는 정언, 승지를 지내고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외직으로는 대구,공주,청주목사를 거쳤는데 가는곳마다 올바른 정사를 펴서 선정비가 세워졌으며, 대구목사로 있을때 단군이래 선조까지의 우리역사와 문화예술풍속 등을 총망라하여 1백7가지 운으로 분류, 저술한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전20권을 편찬했으나 임진왜란으로 일부 소실되고 오늘날 초고본 및 목판 6백77매가 전해지고 있다. 그의 아들 '권별(權鼈)' 은 기자조선 이래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의 왕실의 사적과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의 인물 열전을 집대성한 '해동잡록'을 편찬하였다.

 


권맹손(權孟孫)


1408년 식년문과, 1427년(세종9) 문과중시에 각각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 함길도 관찰사, 공조판서, 대제학등을 역임하고, 1450년(세종32) 이조판서를 거쳐 중추원 부사를 지냈다. 시호는 '제평(齊平)'이다.

 


권문해(權文海)


1560년(명종 1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안동 및 대구부사, 공주목사  등을 역임 하였다.  동부승지, 좌부승지 등을 거쳐 한성부윤, 오위도총부 도총관, 이조판서로 추증 되었다. 퇴계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일가를 이룬 학자로 우리나라 고래의 서적을 널리 참고하여 역사, 인문, 지리, 문학·예술 등을 총망라하여 각 운으로 분류,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20권을 저술했다. 봉산서원(鳳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에 '초간집(草澗集)'이 있다. ( 대동운부군옥책판(부)고본 (大東韻府群玉冊板(附)稿本) 보물 878호 )